치술신모와 망부석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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작성자 장미♥ 작성일03-07-03 12:38 조회102회 댓글0건본문
치술신모와 망부석
신라 눌지왕(訥紙王)에게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. 두 아우가 다 다른 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.
눌지왕 9년에 백관(百官)들이 추천함에 따라 왕명을 받은 박제상(朴提上)은 고구려로 들어가서 왕제 보해(寶海)를 데리고 도망쳐 올 수 있었다.
고구려로부터 돌아온 박제상(朴提上)은 임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그길로 왜국(倭國)에 있는 미해왕제(美海王第)를 구출하려고 바로 율포변(栗浦邊)에서 배를 타는 것이었다.
이 말을 들은 그의 아내가 율포(栗浦)로 달려왔으나 다만 손을 흔들뿐 배는 떠나버렸다.
왜국에 들어간 박제상(朴提上)은 나라에서 도망쳐 온 것이라 말하여 망명을 요구하며 왕제에게 접근을 하였다.
하루는 왕제를 도망치게 하고 그는 스스로 남아 잡히는 몸이 되었다. 죄를 추궁하는 왜왕에게 말하였다.
[차라리 계림(鷄林)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자(臣子)가 되고 싶지 않으며 차라리 계림의 형장(刑杖)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녹작을 받고 싶지 않소]하는 것이었다.
왜국에서 그는 나라에 욕되게 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.
지아비의 죽은 소식을 들은후 그의 아내는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였다.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멀리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. 죽은 몸은 돌로 화해 망부석(望夫石)이 되고 혼은 수리새가 되어 날아가 산아래에 앉았다. 새는 다시 날아 남쪽에 있는 한 바위 구멍으로 숨었다. 그래서 마침내 치술신모가 되니 치술령 산신이다.
사람들은 뒷날 새가 날아와서 앉은 자리를 비자현(飛自峴)이라 하다가 비조(飛鳥)라 부르니 두동면 만화리(斗東面 萬和里)에 있다.
또 새가 숨은 바위를 은을암(隱乙巖)이라 하며 절을 지어 그 이름 또한 은을암(隱乙巖)이라 하니 범서면 국수봉(凡西勉 菊秀峯)의 은을암(隱乙巖)이 그것이다.
혹은 말하기를 장녀 아기(阿奇) 3녀 아경(阿慶)도 같이 울다가 마침내 죽었다한다. 이때 2녀 아영(阿榮)은 따라 죽을 수 없었다.
[만약 내마저 죽는다면 누가 우리 모자(母姉)를 묻어주며 어린 동생 문량(文良)은 누가 거두어 기르리]하였다.
뒤로 신모사(神母詞)와 치산원을 세워 제사를 받들어 왔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만화리에 다만 그 터만 남아있을 뿐이다. 치술령 위에는 오늘도 망부석이 매서운 눈초리로 멀리 왜국을 바라보고 있다.
신라 눌지왕(訥紙王)에게는 불행한 일이 있었다. 두 아우가 다 다른 나라에 볼모로 가 있었다.
눌지왕 9년에 백관(百官)들이 추천함에 따라 왕명을 받은 박제상(朴提上)은 고구려로 들어가서 왕제 보해(寶海)를 데리고 도망쳐 올 수 있었다.
고구려로부터 돌아온 박제상(朴提上)은 임금의 근심을 덜어주기 위해 그길로 왜국(倭國)에 있는 미해왕제(美海王第)를 구출하려고 바로 율포변(栗浦邊)에서 배를 타는 것이었다.
이 말을 들은 그의 아내가 율포(栗浦)로 달려왔으나 다만 손을 흔들뿐 배는 떠나버렸다.
왜국에 들어간 박제상(朴提上)은 나라에서 도망쳐 온 것이라 말하여 망명을 요구하며 왕제에게 접근을 하였다.
하루는 왕제를 도망치게 하고 그는 스스로 남아 잡히는 몸이 되었다. 죄를 추궁하는 왜왕에게 말하였다.
[차라리 계림(鷄林)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자(臣子)가 되고 싶지 않으며 차라리 계림의 형장(刑杖)을 받을지언정 왜국의 녹작을 받고 싶지 않소]하는 것이었다.
왜국에서 그는 나라에 욕되게 하지 않고 죽음을 택했다.
지아비의 죽은 소식을 들은후 그의 아내는 사모하는 정을 이기지 못하였다.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에 올라가 멀리 왜국을 바라보며 통곡하다가 죽었다. 죽은 몸은 돌로 화해 망부석(望夫石)이 되고 혼은 수리새가 되어 날아가 산아래에 앉았다. 새는 다시 날아 남쪽에 있는 한 바위 구멍으로 숨었다. 그래서 마침내 치술신모가 되니 치술령 산신이다.
사람들은 뒷날 새가 날아와서 앉은 자리를 비자현(飛自峴)이라 하다가 비조(飛鳥)라 부르니 두동면 만화리(斗東面 萬和里)에 있다.
또 새가 숨은 바위를 은을암(隱乙巖)이라 하며 절을 지어 그 이름 또한 은을암(隱乙巖)이라 하니 범서면 국수봉(凡西勉 菊秀峯)의 은을암(隱乙巖)이 그것이다.
혹은 말하기를 장녀 아기(阿奇) 3녀 아경(阿慶)도 같이 울다가 마침내 죽었다한다. 이때 2녀 아영(阿榮)은 따라 죽을 수 없었다.
[만약 내마저 죽는다면 누가 우리 모자(母姉)를 묻어주며 어린 동생 문량(文良)은 누가 거두어 기르리]하였다.
뒤로 신모사(神母詞)와 치산원을 세워 제사를 받들어 왔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만화리에 다만 그 터만 남아있을 뿐이다. 치술령 위에는 오늘도 망부석이 매서운 눈초리로 멀리 왜국을 바라보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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